'세계문학전집'에 대한 거부감을 조금은 낮춰준 책
잠을 잘 자고 싶어서 선택한 책이다. '데미안' 정말 수도 없이 많이 들어본 제목이다. 서점의 '세계 문학 코너'에 가면 항상 만날 수 있었던 바로 그 책. 하지만 지금까지 읽어볼 시도도 하지 않았다. '세계문학전집'이라는 타이틀로 01, 03, 05, 07 ∙ ∙ ∙ 이렇게 번호가 매겨진 책들은 '어려운 책'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고리타분한 표지 디자인과 폰트를 보고 있자면 읽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뭔가 '읽은 척'을 해야 할 것만 같은 책. '세계문학전집'에 속한 책들은 내겐 그런 이미지였다. 데미안도 그중 하나로 거부감이 드는 책이었지만 졸리고 싶어서 읽어나갔다.
하품이 날 걸 각오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재미있게 읽혔다. 문장도 크게 어렵진 않았다. 주인공인 에밀 싱클레어가 성장해나가는 이야기다. 싱클레어를 중심으로 여러 등장인물들이 나오지만 책 제목이 '데미안'인 만큼 데미안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싱클레어의 기억을 쫓아가며 인물들의 생각과 감정을 묘사하는데 이 묘사가 참 신기했다. 싱클레어의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내 이야기 같기도 하고, 누군가 나를 들여다본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재미가 있었다. 읽는 내내 다양한 생각들이 끊임없이 솟아났다. 좋은 생각들 보단 주로 부정적인 기억들이 떠올랐다. 잊고 싶은 흑역사들, 불안한 감정, 불쾌했던 일들, 두려웠던 기억들, 해서는 안 됐지만 해버린 일들, 남들에게 상처를 줬던 기억들이 자꾸 떠올랐다. 지금까지 모습을 돌아보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면 좋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이야기 안에서 이렇게 다양한 생각을 할수록 도와주는 게 소설인가? 이런 것이 작가들이 깊이 고민하여 책에 설치한 장치들인가? 생각했다. 사람들이 글을 읽으면서 이렇게 다양한 감정을 느끼도록 치밀하게 계산하며 글을 써 내려가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똥처럼 싸 내려가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게 뭐가 됐든 글을 써낸 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란 걸 느꼈다. 읽는 동안 신비한 기분을 여러 번 느꼈다.
책의 주제를 책 마지막에 '톺아보기'처럼 명쾌하게 정리해보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다 이해하기엔 난해한 부분이 많았다.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온전히 살아보라는 건지? 끌어당김의 법칙을 이야기하는 건지? 세계는 머릿속에 있다는 일원론을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세계문학전집'은 역시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과연 몇 번 더 읽더라도 이 책을 깔끔하게 이해하는 게 가능할까 싶었다.
'세계문학전집'이라는 거부감을 조금은 낮춰준 책이다. 좋았다. 빌려 읽은 책이었는데 새 책을 사서 줄도 치고 메모도 하며 더럽게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게 세월을 살아남은 책이라는 건가? 많이 읽힌 책들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편견 때문에 펼쳐보지도 않은 고전들이 셀 수도 없을 텐데,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았던 문장들
그런데 한 번뿐인 생명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의미에 대해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른다. 오늘날엔 한 명 한 명이 자연의 소중하고 유일무이한 시도인 인간을 무더기로 쏘아 죽인다. 만일 우리가 더는 단 하나뿐인 소중한 목숨이 아니라면, 만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총알 하나로 세상에서 완전히 없어질 그런 존재라면 이런 이야기를 쓰는 건 무의미할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모두 오롯이 그 자신일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특별하고 중요하고 진기한 단 하나의 점이기도 하다. 세상의 여러 현상이 똑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지 않고 오직 단 한 번만 교차하는 그런 점 말이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는 모두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하며, 인간은 누군가로 살면서 자연의 뜻을 실현하는 한 모두 관심을 받을 만한 경이로운 존재이다. 누구의 내면에서건 정신은 만들어지고, 누구의 내면에서건 피조물은 괴로워하고, 누구의 내면에서건 한 구세주가 십자가에 매달린다.
"상상이 돼? 그렇게 먼 곳에서 찾아온다는 게? 그러니까 수컷들은 몇십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서도 이 암컷 한 마리를 감지해. 사람들이 그 원리를 설명해 보려고 하지만 쉽지 않아. 분명 탁월한 후각이나 그 비슷한 능력 덕분일 거야. 훌륭한 사냥개가 보이지 않는 흔적을 찾아 추적하는 것처럼 말이야. 이해하겠어? 자연엔 그런 일이 넘쳐나.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설명하지는 못해. 다만 내 생각은 이래. 그 나방 종에서 암컷이 수컷처럼 흔했다면 수컷은 결코 이렇게 예민한 코를 갖지 못했을 거라고! 수컷들이 그런 코를 가지게 된 건 스스로를 그렇게 단련했기 때문이야. 결국 동물이든 사람이든 온 신경과 의지를 어떤 특정한 것에 집중하면 그것을 얻을 수 있어. 그게 다야. 네가 신기하게 여긴 것도 다 그런 원리야. 너도 어떤 사람을 정해서 자세히 관찰해 봐. 그러면 그 사람 자신보다 그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어."
"그런 질문을 하다니 훌륭해! 사람은 그렇게 항상 물어보고 의심해야 해. 근데 그 문제는 아주 간단해. 나방이 자기 의지를 별이나 그 비슷한 것에 향하게 한다고 해서 그게 될까? 불가능해. 그런 시도도하지 않을 테고. 나방은 자기한테 의미와 가치가 있고, 자기에게 필요하고, 자기가 무조건 얻고 싶은 것만 추구할 뿐이야. 그럴 때에만 정말 어마어마한 결과를 얻을 수 있어.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마법의 육감을 발전시킨 게 바로 그 결과야. 그런 면에서 우리 인간은 동물보다 여지가 많고 관심도 많은 게 사실이야. 하지만 우리도 비교적 좁은 범위에 속박되어 있고, 그 범위를 뛰어넘을 수는 없어. 물론 이런저런 상상은 할 수 있겠지. 가령 꼭 북극에 가고 싶다는 꿈같은 거 말이야. 하지만 그런 소망은 내 속에 완전히 뿌리를 내려 내 마음이 정말 그 소망으로 가득 찰 때만 진정으로 원하고 실행으로 옮길 수 있어. 마음이 소망으로 가득 차면 네 마음속에서 명령하는 것을 시험해 봐. 그러면 마치 훌륭한 말을 앞에 매다나 것처럼 네 의지를 마음껏 펼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안 되는 것도 있어. 예를 들어 우리 신부님이 이 앞으로 안경을 안 쓰고 다니게 하겠다는 생각이 그런 거야. 그런 일은 아무리 의지를 쏟아도 안 돼. 그냥 장난일 뿐이거든. 반면에 지난가을처럼 내가 앞쪽 자리를 뒤로 옮겨야겠다고 확고한 의지를 가졌을 때는 순순히 잘 풀렸어. 그때까지 아파서 학교에 나오지 않던 애가 갑자기 등교하는 바람에 알파벳 순서로 나보다 앞에 있던 그 애에게 누군가 자리를 내주어야 했는데, 당연히 내가 그랬지. 내 의지는 항상 그런 기회를 잡을 준비를 하고 있었거든."
"이런 이야기는 하루에 다 끝낼 수가 없어. 너더라 살인을 하라거나 여자를 강간해서 죽이라는 이야기가 아니야. 그건 절대 아니지. 넌 아직 '허락된 것'과 '금지된 것'의 본래 의미를 면밀히 꿰뚫어 볼 단계까지 오지 않았어. 이제 겨우 진실의 일부를 감지한 것뿐이야. 다른 게 곧 올 거야. 너 자신을 믿어! 예를 들어 넌 1년 전부터 네 속에 어떤 충동을 느끼고 있어. 성적 충동 말이야. 다른 어떤 것보다 강한 그 충동은 일반적으로 '금지된 것'으로 분류돼. 반면에 그리스인들과 다른 많은 민족은 이 충동을 신성하게 여겼고, 그것을 위한 성대한 축제를 벌이며 경배하기까지 했어. 그러니까 어떤 것도 영원히 '금지된 것'은 없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지금도 신부님 앞에서 여자와 결혼을 맹세하면 누구든 여자와 잘 수 있어. 하지만 그런 의식 없이도 여자와 자는 것이 허락된 민족도 많다. 지금까지도 말이야. 그래서 어떤 것으로 하지 말아야 하고, 어떤 것을 해도 되는지는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해. 각자 판단해야 한다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금지된 것은 해선 안되고, 그런 것을 하면 몹시 나쁜 놈이 된다고 생각해. 거꾸로도 마찬가지야. 나쁜 놈이라야만 금지된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건 그냥 편안함의 문제야. 편안한 것에 푹 빠져서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 결정권을 잃은 사람이 바로 남이 금지해 놓은 대로 따르는 거야. 그런 사람은 쉽게 살아. 반면에 그들과 다른 사람들은 자기 속에서 도덕적 법칙을 찾아. 그래서 다른 데서는 금지된 일도 그들은 할 수 있어. 사람은 누구나 독자적으로 살아야 해."
"싱클레어, 너를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은 없었다. 더구나 네가 지금 어떤 목적으로 이렇게 술을 마시는지는 우리 둘 다 몰라. 네 인생을 지휘하는 네 안의 그것만이 알겠지. 그렇다면 이건 알고 있는 게 좋아. 우리 안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알려고 하고, 모든 것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다는 걸 말이야. 미안, 이제 집에 가봐야겠어."
겉으로는 코밑수염이 거뭇거뭇한 성인이었지만 속으로는 목표도 없이 어찌할 줄 몰라 허둥대는 아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내 속의 목소리와 꿈속의 영상이었다. 나는 그 목소리가 이끄는 대로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의무를 느꼈다. 그러나 그건 쉽지 않았고 날마다 그에 대한 반감이 치솟았다. 이런 생각도 자주 들었다. 혹시 내가 미친 건 아닐까? 내가 원래 남들과 다른 건 아닐까? 그러나 남들이 하는 건 무엇이든 나도 할 수 있었다. 조금만 열심히 노력하면 플라톤도 읽을 수 있었고, 삼각법 문제를 풀거나 화학적 분석 과정도 따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할 수 없는 게 있었다. 내 속에 희미하게 숨어있는 목표를 밖으로 명확히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남들은 자신이 교수나 판사, 의사, 혹은 예술가가 되고 싶은 것을 정확히 알고, 그러려면 얼마나 걸리고, 그런 직업에는 어떤 장점이 있는지 꿰차고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물론 나도 언젠가는 뭔가가 되겠지만, 그게 뭔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어쩌면 나도 앞으로 여러 해 동안 그것을 찾고 또 찾아야 할지 모른다. 그러다 어쩌면 아무것도 되지 못하거나 어떤 목표에도 이르지 못할 수도 있고, 또 어쩌면 목표에 도달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악하고 위험하고 끔찍한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을 온전히 살아 보려 한 것 밖에 없는데 그게 왜 그리 어려웠을까?
"우리는 항상 우리 개성의 경계를 너무 좁게 긋고 있네. 개인적으로 구분되는 것과, 정상적인 것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항상 개성이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우리는 세계로 이루어져 있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우리 속에 다 들어 있다는 말이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우리의 몸속에는 물고기 시절이나 훨씬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진화의 전 계보가 다 담겨 있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에도 그전까지 인간 영혼들이 경험한 모든 것이 담겨 있네. 그래서 그리스에서건 중국에서건, 아프리카의 줄루족에서건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신과 악마들은 우리 속에 함께 있고, 가능성과 갈망으로서, 비상구로서 늘 존재하는 법이네. 만일 인류가 멸망한 뒤,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재능을 갖춘 아이가 하나 살아남았다면 그 아이는 인류가 걸어온 모든 과정을 재현해 낼 것이고 온갖 신과 악마, 낙원, 계율과 도덕적 명령, 신약과 구약성서, 이 모든 걸 다시 만들어 낼 수 있을 걸세."
"좋은 말씀이지만, 그렇게 되면 개인의 가치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속에 이미 모든 것이 이루어져 있다면 우리가 노력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만" 피스토리우스가 격하게 소리쳤다.
"세계를 그저 자기 속에 담고만 있느냐, 아니면 그것을 인식까지 하고 있느냐는 큰 차이네. 어떤 미친 인간이 플라톤을 연상시키는 사상을 내놓을 수도 있고, 헤른후트 신학교에 다니는 한 경건한 소년이 그노시스파나 조로아스터교에서나 나타나는 심오한 신화적 관련성을 창조적으로 숙고할 수도 있네. 하지만 세계가 자기 속에 있다는 걸 모르는 한, 그 친구는 여전히 나무나 돌, 기껏해야 동물에 불과하네. 그러다 그걸 처음으로 어슴푸레하게라도 깨닫는 순간 인간이 되지. 자네도 설마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모든 두 발 달린 것들이 다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직립보행을 하고, 어미 배 속에서 아홉 달을 있다가 나왔다는 이유로 말이네. 그래, 그들 중에는 아직도 물고기가 양, 벌레, 거머리인 것들이 엄청나게 많네. 개미와 벌인 것도 많고! 물론 그들 각자 속에는 인간이 될 가능성이 있지. 하지만 그것을 예감하거나, 어느 정도 자각할 수 있어야 비로소 그 가능성이 자기 것이 되네."
"자네를 날게 한 그 힘은 우리 각자가 가진 인류의 위대한 자신이네. 모든 힘의 뿌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정이기도 하고. 하지만 사람은 그 힘을 곧 두려워해. 빌어먹을 정도로 위험하게 느끼는 거지.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나는 걸 손쉽게 포기하고, 차라리 법 규정에 맞게 인도로 걷는 쪽을 택해. 하지만 자네는 아니야. 자네는 계속 날고 있어. 도전적이고 유능한 젊은이라면 의당 그리해야지. 보게, 자네는 아주 신기한 것을 발견했어. 자네가 그 일의 주인이 되고, 자네를 날게하는 위대한 보편적 힘에 작고 섬세한 자신의 힘이 더해지는 것을 느꼈어. 그건 신체 기관이고, 방향키야! 아주 대단한 물건이지. 그게 없이는 무력하게 공중에 떠 있을 수밖에 없네. 그래서 끝 모를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지. 근데 싱클레어, 자네는 말이야, 자네는 그걸 하고 있어. 어떻게 하느냐고? 아직 그걸 모르겠나? 새로운 기관으로 하고 있어! 일종의 호흡 조절기 같은 기관으로 말이야! 이제 자네도 저 깊은 곳에 있는 영혼이 자네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걸세.
그러니까 자네의 영혼이 그 조절기를 발명한 게 아니란 말이야! 그건 절대 새로운 게 아니야. 빌려 온 거지. 수천수만 년 전부터 존재해 왔던 거라고! 물고기의 평형 기관, 즉 부레가 그거네. 실제로 오늘날에도 부레가 일종의 폐 역할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부레를 진짜 호흡 기관으로 사용하는 몇몇 희귀 어종이 있네. 옛 기관을 버리지 않고 아직 보존하고 있는 어종이지. 그러니까 자네가 꿈속에서 비행용 부레로 사용한 폐도 부레와 똑같은 것이네!"
"자네는 가끔 스스로를 이상한 별종 취급하면서, 자신이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과 다른 길을 걷는 것을 자책하고 있어. 그런 건 빨리 잊어버려야 하네. 대신 불을 들여다보고 구름을 쳐다보게. 예감이 밀려오고 영혼 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면 오직 그것들에 자신을 맡기게. 그게 학교 선생이나 아버지, 사랑하는 신의 뜻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 하는 건 따지지 말고 말이야. 그런 걸로 고민하면 스스로를 망가뜨릴 뿐이네. 그래서 일반인들처럼 인도를 걷고 화석이 되고 말지. 싱클레어, 우리의 신은 아브락사스네. 그는 신이자 사탄이고, 자기 속에 밝은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를 다 갖고 있네. 아브락사스는 자네의 어떤 생각, 어떤 꿈에도 절대 손가락질하지 않을 걸세. 그걸 잊지 말게. 하지만 자네가 건실하고 평범한 인간이 되는 순간 아브락사스를 자네를 떠날 것이네. 그래서 자신의 사상을 펄펄 끓일 수 있는 새로운 냄비를 찾아 나서겠지."
"우리가 보는 외부 사물들은 사실 우리 속에 있네. 우리 속에 있는 현실 외에 다른 현실은 없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살아가지. 외부의 형상들만 현실로 간주하고, 자기 속의 고유한 세계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지. 그래도 물론 행복할 수는 있네. 하지만 한번 다른 것을 알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이 걷는 길을 다시는 선택할 수 없네. 싱클레어, 대부분의 사람이 걷는 길은 쉽고, 우리의 길은 어렵네. 그래도 같이 걸어가지 않겠나?"
그동안 나는 미래의 내 모습을 두고 이런저런 추측을 자주 했고, 내가 맡을 수도 있을 역할들, 예를 들어 시인, 예언자, 화가 같은 존재로서의 역할을 꿈꾸어 보곤 했다. 그러나 모든 게 부질없는 짓이었다. 나는 글을 쓰고 , 설교를 하고, 그림을 그리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누구나 마찬가지다. 그런 역할은 부수적 결과일 뿐이다. 우리 각자의 진정한 소명은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 오직 그것 하나뿐이다. 사람은 시인이나 광인, 예언자, 혹은 범죄자로 삶을 끝맺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도 아니다. 우리의 사명은 자신의 운명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 마음대로 정한 그런 운명이 아니라 자기만의 진정한 운명을 찾아내어 자기 속에서 온전히 그리고 굳건히 살아 내는 것이다. 그 밖의 것은 모두 불완전한 반쪽이고, 빠져나가려는 시도이고, 대중의 이상으로 다시 도망치는 것이고, 순응이고, 또 자기 성찰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스스로도 확신이 없는 갈망에 자신을 내맡겨선 안 돼요. 당신이 무엇을 갈망하는지 알아요. 그 갈망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해요. 아니면 정말 제대로 갈망하든지. 마음속으로 갈망이 성취될 거라는 확신이 있어야 요구도 할 수 있고, 그래야 성취도 이루어져요. 그러나 당신은 갈망하는 동시에 후회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두려워하기도 하고요. 그런 건 모두 극복되어야 해요. 동화 한 편 들려줄 테니 잘 들어 봐요."
'톺아보기'에서 좋았던 내용 추출 (길어서 짧게 줄임)
톺아보기를 쓴 글쓴이가 (전성원_계간'황해문화'편집장)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간이 얼마 지나 선배로서 동아리 후배들에게 강연 비슷한 걸 할 기회가 주어졌다고 한다. 동기들은 자리를 잡고 각자의 길을 가고 있었고 자신은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자기만큼 못해 보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느꼈단다. 동기들이 후배들에게 선배다운 말들을 전해주었고, 드디어 글쓴이에게도 차례가 돌아왔다.
무슨 말을 후배들에게 해줄까 고민하다 말했습니다.
"내가 아주 놀라운 걸 보여 줄 테니 다들 눈 꼭 감고 잘 봐라."
제가 워낙 진지하게 말해서인지 후배를 비롯한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죄다 눈을 감았습니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 눈을 감은 채 제게서 무언가 놀라운걸 기대했던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자, 이제 눈을 떠도 좋다."
아이들은 모두 눈을 떴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웅성대며 볼멘소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실망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아주 놀라운 걸 보여 줄 테니 다들 눈을 감고 잘 보라고 했는데 너희 중 누구도 내 말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눈을 감도 잘 보라는 말에 귀 기울인 사람도, 주목한 사람도 없었다. 눈을 감고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우친 사람도 없었다. 너희는 그저 눈을 감으란 선배의 명령을 듣고, 아무 의심 없이 눈을 감았다. 너희는 단지 선배이고, 강단에 섰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너희를 속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고 , 권위에 복종했다. 내가 너희에게 선배로서 친구로서 해 줄 수 있는 충고는 한 가지다.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은 채 남이 시키는 대로만 살면 인생은 절대로 내 것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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